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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업의 자아의 윤회 August 11, 2014

(안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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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무아(anattan)와 윤회(sa s ra)’라는 병렬식 표현(필자는 ‘무아와 윤회’라는 ‘와’를 매개로하는 이러한 병렬식 표현이 불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표현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를 사용한 ‘무아의 윤회’라는 표현이 이 양자의 관계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아와 윤회’라는 표현은 공세적 표현이거나 이러한 공세에 대한 수세적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세는 불교적 관점에서는 납득하기도 수용하기도 어렵고 입증되지도 않는 관념 실체적 자아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윤회가 성립한다는 관념 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의식하고 있거나 함축하고 있다. 즉 생과 생을 거듭하는 윤회는 ‘불변·불멸의 실체적 자아’를 전제해야 하는데, 이러한 실체를 부정하는(무아) 불교가 어떻게 윤회를 주장하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입장은 다시 두 입장으로 나뉠 것이다. ‘무아이지만 윤회가 성립한다'(무아와 윤회의 양립)는 입장과 ‘무아이니 윤회란 성립할 수 없다'(무아와 윤회의 양립불가)는 입장이 그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의 관점에서 ‘무아’와 ‘윤회’를 다루기보다는 일관되게 ‘무아’를 설하고 ‘윤회’를 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무아이지만 윤회가 성립한다’고 애써 주장하는 형태가 아니라, ‘무아이니 윤회한다’ 혹은 ‘무아가 윤회한다’의 형태로 ‘무아’와 ‘윤회’가 나타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무아’와 ‘윤회’는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며, 더 나아가 ‘실체적 자아가 있어야만 윤회가 가능·성립한다’는 입장이 오히려 기이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무아와 윤회’의 병렬적 이해에서는 윤회를 인정하기 위해서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결코 입증될 수 없는 관념까지 전제해야 한다.

초기불교에서 ‘무아’와 ‘윤회’의 양립을 애써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초지일관 오직 ‘무아’와 ‘윤회’를 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의 반실체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실체적 자아에 의한 유아윤회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 혹은 무아의 윤회가 옳다고 말하는 것은 설명이나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전제/고정관념을 버리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제나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은 설명이나 논증으로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뼈 속 깊이 각인되어 온 일차적/기초적 믿음을 버리는 문제일 것이다.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혹은 이와 같은 존재가 사후에도 계속된다는 믿음은 여전히 우리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존재의 무상함을 인정하기를 싫어하여 선호되는, 인류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해온 관념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인도전통의 실체주의적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너무도 당연하게 의심할 바 없이 받아들여진 전제였으며, 인생의 궁극가치인 해탈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자아는 소멸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해탈(sk. mok a)은 이러한 실체적 자아 있음의 확인이다. 실체적 자아는 어느 경우에도 소멸될 수 없으므로, 해탈 상태에서도 이러한 자아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윤회의 개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유아윤회를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전혀 다른 지점인,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관념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것은 허구이며, 윤회는 이러한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며(무아윤회), 열반 또한 실체적 자아 없음에 대한 확인(무아열반)을 포함한다.

실체주의적/우파니샤드적 해탈은 자아(sk. tman)의 절대자(Brahaman)와의 합일(梵我一如)로서, 해탈은 내면의 실체 아트만과 외면의 실체 브라흐만과의 동일성의 인식으로서 ‘절대아’ 아트만 추구의 과정이다.{{ 예컨대 ‘눈으로 볼 수 없으나 보게 하고, 들을 수 없으나 듣게 하고, 말해질 수 없으나 말하게 하고, 생각될 수 없으나 생각하게 하는 그 것’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

그러나 초기불교의 열반(nibb na)은 이러한 실체적 자아(attan)의 없음의 확인이며, 자아의 영속적인 소멸을 의미한다. 예컨대 아라한(arahant)이 되어 열반상태에 든 수행승 고디카(Godhika)와 바칼리(Vakkali)의 절멸된 의식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질책 당한다.

이처럼 실체적 자아의 인정과 불인은 윤회개념에 있어서 차이뿐만 아니라 해탈/열반 개념에 있어서의 차이까지 만들어낸다. 유아해탈이 실체적 자아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듯이, 무아열반은 실체적 자아의 부정을 전제한다.

그런데 유아윤회와 유아해탈, 그리고 무아윤회와 무아열반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실체아의 존재유무는 일상적 경험이나 오감각을 통해 확인·입증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유아해탈은 신비적 직관을 통해서, 무아열반은 삼매상태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될 수 있을 뿐이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종교체험의 문제이다.{{ 실체적 자아의 유무문제는 이와 같은 체험의 문제이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실체적 자아가 있다 혹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논리학에서 말하는 ‘무지로부터의 오류'(argument from ignorance) 어떤 주장이 반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참이라고 하거나,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추리하는 오류 를 범하게 될 것이다.}}

실체아의 존재유무는 평상적 수준에서의 경험과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더 이상 왈가왈부 할 수 없는 기초적 믿음(a basic belief)과도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회개념에 있어서 사람들간 개념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윤회’가 연속되는 자아간 동일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실체아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실체론적 윤회개념일 뿐이다. 비실체론적 관점에서 윤회는 반드시 자아간의 동일성(identity)이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윤회는 자아들간 연속성(continuity)만 전제되어도 가능하다. 동일성에 의한 윤회는 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대변하고,연속성에 의한 윤회는 반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대변한다.

주지하다시피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반실체주의적 자아관을 반영한 자아의 업/행위(kamma){{ 필자는 이 글에서 ‘kamma’를 문맥에 따라 ‘업’, ‘행위’, ‘업/행위’ 등으로 옮겨 쓴다. }}에 의한 윤회다.

업/행위가 윤회를 지속시키며, 윤회하는 자아의 연속성은 이 업/행위로 설명된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 때의 업/행위는 의식(vi a)과 갈애(ta h )를 전제·수반한다고 생각되는 업이며, 오온의 행(sa kh ra)과 다르지 않다고 이해되는 업이다.

윤회의 원인으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실체론적 입장에서 말하는 업과 그 의미가 판이하다. 실체적인 업 주체를 부정하는 불교의 업은 단순한 ‘행위’를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위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까지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선택, 의지, 결단 등이 강조되는 업이며, 자아로부터 생겨나지 않고 반대로 자아를 규정하는 업이다.

자아는 오직 업일 뿐으로, ‘무아의 자아’는 ‘업의 자아’다. 이러한 업이 조건을 갖추어 추동력을 얻는 한 멈추지 못하고 윤회가 계속된다는 것이 ‘무아의 윤회’의 핵심이다. 달리는 열차가 갑자기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무아의 윤회’의 자아관은 주지하다시피 상주론과 단멸론의 중도적 자아관으로 설명된다. 동일성을 가진 불멸의 실체적 자아를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재적 자아나 현생 이후의 자아에 대한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상주론도 아니고 단멸론도 아닌 중도적 입장에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자아 ‘연기’의 자아 를 말할 뿐이다.

즉 자아는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조건이 지속되는 한’ 지속·연속되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무아를 가르치면서 어떻게 윤회를 말할 수 있느냐’, 혹은 ‘무아를 가르치면서 어떻게 실체적 자아를 부정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나 비판은 이러한 중도적 자아관 혹은 연기하는 자아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이해 속에서, 필자는 다음에서 초기불교 필자가 이해하는 초기불교 에서 말하는 ‘무아’와 ‘윤회’에 대하여 이해해 보고자 한다. 필자의 출발점은 앞에서 말한 실체주의적 문제의식을 전제하거나 의식해야 하는 ‘무아와 윤회’의 관점이 아니다.

글의 전반부에서는 무아의 의미를 이해하고, 후반부에서는 윤회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 무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무아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본 후에, 의식의 독특한 속성인 의존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윤회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윤회의 심적 구조로서의 12연기, 오취온적 자아의 윤회, 그리고 업에 의한 윤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무아

### 1) 무아의 의미

주지하다시피 석존이 말하는 자아는 고정된 불변의 실체적 자아가 아니다. 매순간 변화하며 조건에 의존하는 자아로서 자아 속에 어떠한 실체적 속성도 없다. 이러한 자아관은 당시의 실체주의적 철학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서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우파니샤드(Upani ad)의 실체주의 철학에서는 현상적 경험아와는 다른 불멸의 실체아/절대아(sk. tman)를 구별하고 후자를 해탈에서 인식되어야 할 주체로 본다.『문다카(Mu daka) 우파니샤드』에서 현상적 경험아와 불멸의 실체아는 ‘나무열매를 열심히 먹고 있는 새’와 ‘자신은 먹지 않고 열심히 먹고 있는 새를 응시하는 새’에 비유된다. 경험아 배후에 참 자아인 실체아가 있으며, 해탈은 ‘이러한 실체아가 곧 브라흐만'(범아일여)이라는 상태의 체득을 의미한다. 현상적인 경험아의 배후에 현상을 초월한 자기동일적 실재로서의 자아( tman)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는 윤회 속에서는 불변·불멸의 자기동일적 실재로 간주된다.

석존의 무아설{{ 이 글에서 필자는 ‘무아’의 의미를 소상히 분석하는 데 관심이 있지 않다(무아의 ‘윤회’에 초점을 맞추어 ‘업’개념에 천착하려고 한다). 초기불교 무아의 개념에 대한 연구는 필자의 시도를 포함하여 국내에 많다. 초기불교의 무아의 의미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분석으로는 조성택 교수의「불교의 이론과 실천수행」(『오늘의 동양사상』 8, 2003)을 참고할 수 있다.}}은 현상 배후의 자기동일적 실체로서 자아(attan)를 부정한다. 현재도 죽음 후에도 이러한 자아는 없다.

이러한 자아가 없다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자아를 여섯 감각(기능)(眼耳鼻舌身意)으로 분석했을 때 이들 중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도 하고, 다섯 가지 요소(몸(r pa/色), 감각(vedan ,/受), 생각(sa /想), 의지/성향(sa kh ra/行), 의식(vi a/識)의 오온)로도 분석하여 1)이것들 어느 것도 자아가 아니며, 2)자아가 이것들을 갖는 것도 아니며, 3)이것들이 자아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4)자아가 이것들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도 한다.{{ 예컨대 Sa yutta-nik ya IV, 1-2쪽.}}

또 이것들 모두는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n)(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고다, 고통스러운 것은 무아다)를 속성으로 한다. 더 나아가서 1)여섯 감각, 2)여섯 감각대상(色聲香味觸法), 3)이 양자를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 여섯 의식(六識), 4)이 삼자의 접촉(觸), 5)이 삼자의 접촉으로 인해 생기는 세 가지 감각/느낌(受/vedan )(쾌감각, 고감각, 쾌도 고도 아닌 감각) 또한 무상·고·무아를 속성으로 한다.{{ Sa yutta-nik ya IV, 24-25쪽.}}

요컨대 오온뿐만 아니라 여섯 감관(감각기능), 여섯 감각대상, 여섯 의식, 이들의 결합, 이들의 결함에서 생기는 세 가지 감각이 무상·고·무아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상하고(anicca), 고통스러우며(dukkha), 변화하는(vipari ma) 것을 가지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예컨대 Sa yutta-nik ya III, 49쪽.}}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특히 중생들이 자아라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오온)에는 어디에도 실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아트만이나 영혼과 같은 자아는 없다.

그런데 석존이 실체주의적 자아관을 거부한다고 하여 인간을 오직 물질적 존재로만 보아 죽으면 끝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체적 자아가 있다는 입장(상주론)도 거부하지만 연속성을 갖는 자아란 없다(단멸론)는 입장도 거부한다. 자아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유무중도). 자아는 조건적으로만 있다. 자아를 발생시키는 조건이 있을 때 그러한 조건들과 함께 자아가 있을 뿐이며, 그러한 조건이 사라질 때 자아도 사라진다.

석존은 중생이 생각하는 자아를 정신적·물질적인 요소들로 해체시키고(오온), 이러한 자아가 대상에 접하여 어떠한 구조로 작용하는가(18요소/18계)를 해부하고 있다. 자아의 기능이나 작용은 있지만 항상적 요소로서의 고정불변의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자아는 오온을 모아 놓았을 때 그것이 유기적으로 기능할 때 있는 것이어서 자아는 작용/기능 자체일 뿐이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자아는 업/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의 특성 때문에 자아는 윤회한다.

석존의 자아분석에서 윤회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특징은 의식(vi a/識)(오온의 의식 혹은 18계의 육식)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그것이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여러 종교·철학 전통에서 마음이나 의식을 실체화시키고 이에 의거하여 실체적 자아를 주장하는 것과는 판이하다. 석존에 의하면 의식 또한 철저하게 의존적인 것이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 또한 무상·고·무아를 속성으로 한다.

의식의 이러한 속성은 윤회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식도 의식의 유사개념인 간다바도 윤회과정에서 조건에 의존해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으로서 독립적 작용주체가 아니다. 그래서 의식은 생과 생이 이어지는 윤회에 있어서 자기동일적 실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석존은 이러한 의식의 의존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좀더 면밀히 살펴보기로 하자.

2) 의식의 속성: 의존성

의식(vi a)도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무상하다.{{ Majjhima-nik ya I, 138쪽. 이 글에 나오는 Majjhima-nik ya의 원문 번역문은 필자의 논문 「업설에 나타난 불교 생명관의 한 특징: 인간과 동물의 평등」(『철학연구』 89, 2004)에서 옮겨 사용하기도 했고, 다른 부분의 번역과 이해에 있어서는 amoli와 Bodhi 스님의 역주본인 The Middle Length Discourses of the Buddha: A Translation of the Majjhima-nik ya(Boston: Wisdom Publication, 1995)를 주로 참조하였고, 전재성 선생님의 역주본 『맛지마니까야』1권(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으로부터도 큰 도움을 받았다.}}

의식은 변화하는 무상한 것으로서 다른 것을 조건으로 해서만 유지되고 기능할 수 있다. 또한 의식은 자아의 소재지도 아닌데,{{ Majjhima-nik ya I, 300쪽.}} 이는 의식의 무상성의 당연한 속성이다.

따라서 의식은 독립적으로 출현하고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못한다. 의식은 음식물, 접촉, 의지와 함께 중생을 유지시키는 네 가지 자양분( h ra)을 이루기도 하고,{{ Sa yutta-nik ya II, 11-13쪽.}} 여섯 감각기관과 그 대상과 함께 작용하기도 하다가(육식), 명색(n ma-r pa)으로서 몸이라는 조건이 사라지면 의식 또한 사라진다. 환언하면, 의식은 조건 발생적이다.

석존은 12연기를 설명하면서(Mah nid na Sutta){{ D gha-nik ya 속함.}} 의식과 명색과의 상호적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의식으로 연하여 명색이 있고(vi n a paccay n ma-r pan) 명색으로 연하여 의식이 있다(n mar pa paccay vi n)고 한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에서는 의식이 있어야 명색의 생겨남이 가능하고, 명색이 의식의 주처가 되어야 태어남/생(j ti)-늙음-병듦-죽음-고 등으로 이어지는 윤회가 일어난다.

‘의식으로 인하여 명색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아난다야, 의식이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명색이 생겨날 수 있을까(samucchissath ti)? 석존이시여, 생겨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오려는 의식이 자궁을 이탈해 버린다면, 이 상태에서 명색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abhinibbattissath ti)? 석존이시여, 없습니다……’명색으로 인하여 의식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의식이 명색에서 주처(pati h )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태어남, 늙음, 죽음, 그리고 고의 생함과 발생이 미래에 일어날 수 있을까(pa yeth ti)? 석존이시여, 일어날 수 없습니다.{{ D gha-nik ya II, 63쪽.}}

위 인용문은 현생과 미래에 인간의 몸(명색)으로서 태어남을 위해서는 의식과 명색이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의식은 홀로, 혹은 주도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인간으로 태어남(명색됨)은 의식의 유입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의식 또한 명색에서 주처를 마련함이 없이는 태어나지/윤회하지 못한다.
사티(S ti) 비구에 관한 경{{ Majjhima-nik ya 38경, Mah ta h sankhaya Sutta.}}도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의식의 이러한 의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티 비구는 석존의 가르침을 곡해한 악견을(p paka di igata )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악견을 바꾸지 않자 석존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석존은 그를 불러 이 사실을 확인하고 꾸짖는다.

사티의 악견은 “바로 이 의식이 유전하여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ev’ ida vi am sandh vati sa sarati, ana anti){{ Majjhima-nik ya I, 256쪽.}}인데, 그는 (현재의/현생의) 동일한 의식이 (조건에 영향 받지 않고 조건과 무관하게,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다음 생으로 윤회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석존은 이러한 악견이 불이익과 고통을 가져온다고 사티를 꾸짖고 의식은 조건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여섯 감각을 연하여 여섯 대상에 대한 여섯 의식이 발생함을 말한다.

이는 마치 서로 다른 연료에 따라 불이 다르게 명명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즉 불이 장작으로 연하여 타면 장작불이라고 불리고, 쇠똥이나 쓰레기 등으로 연하여 타면 쇠똥불이나 쓰레기불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은 의존적으로 존재·기능한다. 의식이 이처럼 명색(혹은 대상)과의 만남으로부터 발현되고 주도적으로 명색을 찾는 방식으로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윤회에 있어도 의식이 불변하면서 자아동일성을 유지시켜주는 그 무엇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의식의 이러한 속성과 의미는 의식의 유사개념이라고 생각되는 ‘간다바'(gandhabba)에서도 나타난다.

초기경전에서 윤회와 관련된 말로서 간다바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간다바가 태아를 생기게 하는 한 조건을 이룬다는 것은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부모의 성행위, 어머니의 가임기와 함께 간다바가 결합되어야 태아가 들어온다고 한다. “여기에 만일 부모의 성행위가 있고 어머니가 가임기 일 때, 간다바(의) 옴이 있다(gandhabho ca paccupa thito hoti). 이 세 가지의 결합(sannip ta)으로부터 태아의 들어옴이 있다”라고{{ Majjhima-nik ya I, 266쪽.}} 말한다.

부모의 성교와 어머니의 가임기에 간다바가 있을 때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질 때 태아가 생긴다는 것이다. 앞에서 ‘의식이 자궁에서 명색을 만남으로써 (다른) 생이 나타난다’는 말에 유비되는 말이다. 간다바와 식이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지만, 태아는 명색이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간다바를 의식이라는 말로 대체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간다바는 잉태상황에서 명명된 의식의 다른 이름으로서 ‘출생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의식의 유사 개념이라고 생각되는 간다바 또한 독립적으로 존재·기능하지 않고 조건과 함께 출현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성교와 어머니의 가임기라는 조건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이와 같은 간다바의 개념으로부터 ‘사후 다음 생을 받기까지 중간 존재로 인식되는’ 중유(中有/中陰, antar -bhava) 개념이 발전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간다바는 그런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 간다바의 개념의 비약이라고 생각되는 ‘바르도'(bardo)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에서 재탄생/환생에 이르는 기간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 이후 환생에 이르는 의식의 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는 바르도의 개념은 사실 초기불교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의식, 그리고 그 유사의식인 간다바의 이러한 조건적 출현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러한 개념이 윤회를 주도하는 주체가 아닐까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중심으로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죽음 후 우리는 어떻게 되며 의식은 어떠한 과정을 거칠까’라는 의문을 품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물음은 석존에 의해 금지된 물음이다.

그렇다면, 석존은 왜 그러한 물음을 금지시키고 있을까? 답변이 이미 자신의 가르침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식의 의존성에 함축되어 있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윤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12연기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다 포괄적으로는 업에 의한 윤회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윤회

무아의 자아가 윤회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개념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12연기, 오취온, 12입처, 18계, 탐진치, 갈애, 집착, 업 등을 통해 윤회의 발생구조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아의 관점에서 볼 때 무아의 실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아는 무명으로 시작하는 12연기라는 심적·실제적 존재 구조를 가지며, 오온을 자아로 집착한다. 중생은 12연기라는 심적 구조 속에서 오온무아를 자아로 집착함으로써 윤회하는 것이다. 업으로 말하자면, 12연기라는 업을 지속시키는 구조를 가지며 오취온이라는 자아구성의 틀을 가짐으로써 윤회를 계속한다.

다음에서는 윤회의 심적 구조로서 12연기, 그리고 오온을 자아로 집착하는 오취온적 자아의 윤회를 살펴본 후, 업에 의한 윤회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윤회의 심적 구조로서 12연기

주지하다시피 12연기는 석존의 깨달음의 핵심내용이다. 그는 12연기를 통해 ‘윤회/고통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보았으며(12연기의 순관), 또한 윤회/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보게 되었다(12연기의 역관)고 한다.
12연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념 하나하나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물론 12연기 전체에 대한 구체적 설명도 초기경전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후대에 12연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다시피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12연기에 대한 정통적 해석은 붓다고샤(Buddhaghosa) 스님의 것으로 12지(a ga)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친 윤회과정과 두 번의 인과관계(三世兩重因果)로 보는 것이다.

삼세양중인과설의 특징은 주지하다시피 12개의 지를 논리적·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는 또한 12연기를 12개의 지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마음의 구조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12연기는 삼세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윤회하고 있는 존재의 마음의 구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2연기가 윤회하는 마음의/심적 구조라는 관점에서, 12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들어 윤회를 말할 때는, 그 어느 하나는 그것에 선행하는 모든 지를 전제한다. 예컨대 식은 무명과 행을 전제한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로 인하여 우리는 실질적으로 현재 윤회적인 삶을 이어감은 물론, 이 생 이후에도 생을 거듭하는 윤회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12지는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이 각각이 독특한 역할을 하는 윤회의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업의 축척으로서 행(sa kh ra), 또 다른 명색/몸 탄생의 조건으로서의 의식(vi a), 쾌 느낌/감각과 이를 가져오는 것들에 대한 갈애(ta h ), 이 갈애를 추동력으로 하는 취착으로서의 취(집착/up d na)의 역할이 특히 주목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윤회의 동력으로써 행(혹은 업), 태어남/생에 있어서 필수적인 의식, 욕탐(chandar ga)으로서의 갈애, 반해탈/속박의 직접원인으로서의 취/집착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2연기가 의미하는 바는 이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을 지멸시켜도 윤회의 끊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각 지들 간 연쇄성 때문이다.

이와 같은 12연기는 윤회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탈윤회적인 인간의 실상에 대한 설명이다. 12연기는 윤회가 과거 우리의 선택이었으며, 현재 우리가 윤회의 삶을 살고 있으며, 미래에도 우리가 어떻게 윤회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윤회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윤회도 윤회의 벗어남도 바로 우리 자신의 선택이라는 메시지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 당장 우리의 마음과 삶을 12연기라는 심적 구조에 비추어, 우리 자신이 윤회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 혹은 윤회를 원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 체크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2연기에 비추어 현재 자신의 윤회여부를 알 수 있다면, ‘사후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무아’라는 나의 존재 속성을 모르는 체 무명(avijj /無明)에서 신구의의 행위(행/업)를 하고, 이러한 행/업으로부터 비롯되는 의식활동(식)을 지속하고, 이런 방식으로 12연기의 심적 구조에 따라 평생을 살고 죽기 직전까지 이러한 마음의 패턴을 유지시킨다면, 윤회는 분명하고 따라서 사후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석존은 의식과 명색의 상호 의존성과 12연기에 대한 설명을 통해 생사/윤회의 일어남과 그침을 설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들은 존재했었을까? 과거에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았었을까? 과거에 우리들은 어떻게 존재했었을까? 과거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존재했었다가 무엇이 되었을까?……미래에 우리들은 존재할 것인가? 미래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 미래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존재하였다가 무엇이 될 것인가?……나는 존재하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이 중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Majjhima-nik ya I, 265쪽.}}

석존은 ‘과거에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 어떤 존재였으며, 미래에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무엇이 될 것이며, 현재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식의 물음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류의 물음은 잘못된 자아관을 갖게 하기 때문에 금지 시킨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러한 종류의 물음이 잘못된 여섯 가지 자아관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한다(Majjhima-nik ya I, 8쪽).}} 다른 한편 우리의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삶에 대해서 석존 자신이 분명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이러한 물음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의식과 명색의 상호 의존성이나 12연기설 등을 통해서, 보다 포괄적으로는 업(의 자아)에 의한 윤회를 통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2) 오취온적 자아의 윤회

오온으로서의 자아(혹은 18계속에서의 자아)가 갖는 무상·고·무아의 속성을 모르는 윤회의 자아는 오온에 집착하는 오취온(pa cup d nakkhandh /五取蘊)의 삶을 산다. 그리하여 오취온의 자아로서 윤회하게 된다. 석존은 오온에 집착할 때 존재가 미래에도 생/태어남을 거듭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석존은 우리가 (오온에 대한 집착에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물과 같은 외부 대상들에 대해 집착할 때도 윤회를 거듭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외부 대상에 대한 집착은 본질적으로 오취온의 변형형태이거나 오취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오취온의 존재방식은 ‘나 만들기'(aha k ra)와 ‘나의 것 만들기'(mama k ra) 형태로 나타나며, 외적 대상에 대한 집착도 ‘나 만들기’나 ‘나의 것 만들기’와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온(무아)의 관점에서 볼 때, 윤회는 오온에 집착하는 바로 이러한 오취온적 자아의 존재방식 때문이다. 그래서 석존은 오온에 대한 집착이 윤회를 생겨나게 하며, 외부 대상에 대한 집착이 윤회를 지속시킨다고 말한다.

석존은 오온에 끌리지 않는 무집착의 삶에 의해 윤회를 끊게 된다고 한다. 그는 ‘마음이 색·수·상·행·식 오온에 끌리지 않아(virajjati) 집착에 의한 번뇌로부터 해탈되고, 해탈되어 닛바나에 이르고 윤회를 끊게 된다'{{ Sa yutta-nik ya III, 44-45쪽.}}고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한 집착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bhava/有)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등의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Majjhima-nik ya I, 511쪽.}}

그런데 오취온적 자아의 태도는 외부대상을 향해 확대된다. 외부대상에 대해서도 ‘나에게 있는 것(속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Majjhima-nik ya II, 264쪽.}} ‘어느 것 어느 곳에도 내 것이라는 것은 없는데,{{ A guttara-nik ya. II, 177쪽. 주지하다시피, 팔리어에는 소유를 나타내는 동사가 없다. 그래서 ‘있다/이다’ 의미의 ‘atthi'(to be, to exist)로 소유를 표현한다. }} 오취온적 자아는 사람과 사물 등을 ‘나의 것’으로 여겨 거기에 집착한다. 배타적·집착적 소유태도로서 외부대상과 관계 맺는 것이다.

석존은 고귀한 구함과 고귀하지 못한 두 가지 구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외부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오취온적 삶을 예시한다. 고귀하지 못한 구함은 우리를 윤회하게 하는 외부대상 사람, 가축, 금은과 같은 재산 등의 집착물(upadhayo) 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에 속박되어 있으면서도 이러한 것을 구하기 때문에 윤회가 계속된다고 한다.

여기에 어떤 이가 자신이 태어남의 조건/상태로 있으면서(attan j tidhammo) 또한 똑같이 태어남의 조건을 구한다(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비구들이여, 태어남의 조건이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내와 자식이 태어남의 조건에 있는 것이며, 남녀 노예, 염소와 양, 닭과 돼지, 코끼리, 소, 숫말과 암말, 금과 은이 생겨남의 조건에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집착물(upadhayo)들이 태어남의 조건이다. 이러한 것들에 속박되어 있고, 정신을 잃고, 탐착하고, 스스로 생겨남의 조건에 있으면서 또한 똑같이 생겨남의 조건을 구한다(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Majjhima-nik ya I, 161-162쪽.}}

중생은 윤회의 조건 속에 있으면서, 윤회의 조건을 구하기 때문에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윤회를 피하는 것은 이러한 윤회의 조건을 직시하고 윤회를 일으키는 것들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윤회 조건의 위험을 알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 고귀한 구함이다. 석존은 고귀한 귀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가 자신이 태어남의 조건에 있으면서 똑같이 태어남의 조건에 있는 위험을 알고 태어나지 않는, 최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열반/닛바나(aj ta anuttara yogakkhema nibb na )를 구한다(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Majjhima-nik ya I, 162-163쪽.}}

석존 또한 자신의 출가 이전과 이후의 삶을 두 종류의 구함으로 설명한다.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자신도 스스로 태어남의 조건에 있으면서 똑같이 태어남(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을 구했다고 한다(고귀하지 못한 구함).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왜 나는 스스로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있으면서 또한 똑같이 그러한 조건을 구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태어남의 조건이 갖는 위험을 알고 닛바나를 구하게 되었다고 한다(고귀한 귀함).{{ Majjhima-nik ya I, 163쪽.}}

이처럼 무아의 실상을 모르는 체 우리는 오취온적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윤회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3) 업/행위에 의한 윤회

(1) 자아는 업/행위이다

초기불교의 자아에 대한 서술의 특징은 ‘무아'(an-attan)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니다/없다'(an/a)라는 방식의 부정형 표현이다. 그 의미를 긍정형으로 표현한다면, ‘자아는 업/행위(kamma)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정 불변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없지만, 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행위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무엇’의 의미로서의 자아는 없지만, ‘어떻게’의 의미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개념이 요청하는 것은 있지도 않는 ‘무엇’의 자아를 쫓지 말고, ‘어떻게’의 자아를 쫓으라는 것이다. 일순간의 업/행위를 생각하며 행동하고, 이것이 축적되어 이루는 평생의 업/행위를 생각하며 행동함으로써 행위에 의해 자아를 규정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아의 자아’를 ‘행위의 자아’라고 했을 때의 ‘행위’는 일회적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가 축척·고착되어 이루어진 행위패턴까지를 의미한다. 행위패턴을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습관, 성격/성향, 성품을 의미한다. 또한 석존이 말하는 행위/업은 신구의 행위(k ya kamma)(身), 말(vac kamma)(口), 그리고 마음/생각(mono kamma)(意)을 포괄하므로, 업은 신구의를 통한 단일 행동뿐만 아니라 신구의에 있어서의 습관, 성격/성향,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업은 오온에서 말하는 행(sa kh ra/行)과 다르지 않다.{{ ‘업’과 오온의 ‘행’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우선 ‘kamma(업)’와 ‘sa kh ra'(행)의 어원은 모두 ‘k ‘(행위하다)로 같다. 후자의 경우 접두사 ‘sa ‘(함께)이 붙은 점이 다를 뿐이다(업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성향/성품’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을까?). 팔리어 사전을 보면, ‘sa kh ra’는 ‘윤회를 일으키는 의도나 마음상태'(S. II, 82의 사용례를 들어)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되어 있는데(Davids, Rhys, Pali-English Dictionary(PTS. 1979), 664쪽), 이는 ‘업’ 개념에서 의도가 강조되고 있으며 업이 윤회를 일으킨다는 점과 흡사하다. 또한 초기경전에서는 신구의 업을 말할 때 ‘업’이라는 말 대신 ‘행’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Majjhima-nik ya I, 389쪽). }}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업의 특징은 ‘의도'(cet na)를 강조한다는 데 있다. 업에 대한 정의로서 빈번히 인용되고 있는 “나는 …… 의도를 업이라고 부른다(cetan ha ……kamma vad mi)”{{ A guttara-nik ya III, 415쪽.}}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시피. 행위에 있어서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말은 과장되게 이해되어 왔지만, 필자는 이 말을 ‘의도 자체도 행위이며, 신구의를 통해 표출되는 모든 행위에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고자 한다.{{ 붓다고사 스님의 이후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과장되거나 곡해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의도가 결여된 업은 업이 아니다’라거나 ‘의도 없이 무심코(혹은 무의식적으로) 한 행위는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아니다’라는 등의 해석이 그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해가 원문의 맥락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비논리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소상한 논의는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한다. }} 의도 자체가 행위 일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에 의도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업에 있어서 어떤 의도를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행위의 자아’에게 어떠한 행위가 요청되는가? 당연히 선한 행위, 즉 선업이다. 선업(kusala kamma)과 악업(akusal kamma)이 나타나는 방식은 오계, 사섭법, 사무량심, 팔정도, 자비 등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덕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는 신구의의 청정한 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 보다 소상히는 10가지 선행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신구의의 더러움(asoceyya)을 정화시키는 10가지 선행으로서 신구의 각각에 대하여 3, 4, 3가지 행동을 말한다. 그 내용은 1)생명체를 상해하지 않는 것, 2)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는 것, 3)올바르지 않는 성적 욕구를 갖거나 근친상간이나 법을 어기는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 4)모르는 것을 안다고(혹은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하거나, 보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혹은 본 것을 못 보았다고) 하거나, 자신이나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 5)화합을 깨고 싸움을 일으키는 이간시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6)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 폭언, 화를 촉발시키는 말 등과 같은 거친 말을 하지 않는 것, 7)무의미한 말, 때에 맞지 않지 말, 사실과 합치하지 않는 말, 무익한 말, 법과 율에 맞지 않는 말, 무가치한 말, 사리에 맞지 않는 말, 들을 가치가 없는 말, 이로움과 무관한 말 등을 하지 않는 것, 8)질투하지 않는 것, 9)악의/적의를 품지 않는 것, 10)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이다.{{ A guttara-nik ya V, 264-265쪽.}}

반대로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10가지 악행이 된다.{{ 나타나 있다시피, 10가지 악행은 오계 중에서 불음주계를 제외한 다른 네 가지 계의 확장으로서 그 전체가 신구의 선행/청정으로 압축된다. 10가지 선행에서 주목되는 것은 열 번째의 ‘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인데, 이는 올바른 견해(정견)를 갖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팔정도에서도 명시되고 있다시피, 정견은 불교윤리의 출발점이면서 토대다. 올바른 견해를 가짐으로써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고 이로부터 올바른 말과 올바른 행위가 비롯되기 때문이며, 그릇된 견해는 이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A guttara-nik ya V, 211-212쪽). }}

그런데 업의 자아가 선업/선행을 추구한다는 것은 보다 근원적으로 말하여 탐욕(r ga), 싫어함/미워함/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탐진치의 지멸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행을 하느냐 혹은 악행을 하느냐는 탐진치의 유무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선한 행위, 선한 말, 선한 생활을 ‘선한 습관'(kusalas la)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탐진치를 여읜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Majjhima-nik ya I, 27쪽.}}

반대로 악한 행위, 악한 말, 악한 생활에 대해서는 ‘악한 습관'(akusalas la)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탐진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Majjhima-nik ya I, 26쪽.}} 요컨대 선행은 무탐진치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악행은 탐진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선행과 악행의 뿌리(m la)가 무탐진치의 마음과 탐진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업/행위로서의 자아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상태는 탐진치 지멸의 마음이다. 궁국의 선은 탐진치 지멸의 마음 상태이며, 이러한 선의 상태는 선인/아라한의 최종 도달점이다. 이러한 지점에서는 더 이상 추구되는 선업/선행은 없게 된다. 이 상태는 업의 소멸상태로서 도덕적 인과로 말하자면,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행위에 대하여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결과’의 인과법이 적용된다.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완수해야 할 일이 없고, 행위로서 쌓아놓은 업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윤회를 추동시킬 수 있는 업이 지멸된 것이다.

(2) 업/행위의 자아의 윤회: 도덕적 인과에 따른 윤회

업/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로서의 자아는 자신의 업에 의해 과보를 받으며 윤회한다. 업의 선악에 따라 자신의 존재상태를 규정받고 규정해 가는 존재다. 선한 행위는 자아를 좋은 존재상태 속에 규정하고, 악한 행위는 나쁜 존재상태에 규정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행위의 자아는 ‘선업선과/악업악과’라는 도덕 인과법 혹은 업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석존은 행위와 결과의 인과관계를 네 가지 경우로 설명한다. 즉 1)악행악과, 2)선행선과, 3)악하면도 선한 행위에 대한 악하면서도 선한 결과, 그리고 4)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행위에 대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결과 행위의 소멸로 이끄는 인과 경우로 설명한다.{{ Majjhima-nik ya I, 389쪽.}}

1)과 2)는 업 법칙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주며, 3)은 선악 양면적 속성을 가진 행위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인과를 설명하는 것으로 업 법칙에 어긋나지 않으며, 4)는 업을 소멸시켜 업의 속박을 더 이상 받게 되지 않아 열반에 이른 아라한의 상태를 의미한다.

‘선인선과/악인악과’라는 업 법칙은 또한 모든 행위는 보상(reward)이나 처벌(punishment)로서의 결과/과보를 가져온다는 것을 전제한다. 결과/과보를 의미하는 ‘phala’와 ‘vip ka’라는 말은 모두 ‘익다’를 의미하는 동사로부터{{ ‘phala’와 ‘vip ka’는 각각 동사 ‘익다'(ripe)를 의미하는 ‘phalati’와 ‘vi vac’로부터 파생. }} 파생된 말로서 특정행위가 결과를 맺을 때까지의 시간을 함축한다.

특정행위의 결과는 1)이 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2)다음 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으며, 3)그 이후의 어느 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A guttara-nik ya III. 414쪽.}}

행위가 결과를 맺기까지의 시간은 ‘행위 직후’에서부터 ‘기약할 수 없는 긴 기간’에까지 걸쳐있다. 또한 동일한 행동도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그 과보가 다를 수 있다. 경전에서는 한 줌의 소금을 컵에 넣는 경우와 갠지스 강물에 넣는 경우에 비교한다.{{ A guttara-nik ya I, 249-253쪽.}}

한 줌의 소금을 컵에 넣을 때 물은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강물에 넣는 경우 물은 여전히 마실 수 있는 것처럼, 동일한 행동도 어떠한 사람이 했느냐에 따라 과보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석존은 이에 대해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예컨대 돈을 훔친 ‘동일 행위’의 경우도 행위자가 어떠한 사람이냐에 따라 다음 생에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이 생에서 그 행위가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는 ‘몸을 닦고, 계를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으며, 넓은 한량없는 마음의 사람'{{ A guttara-nik ya I, 249쪽.}}이냐 아니냐에 따라 동일 행위에 대한 과보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행위와 과보 간에는 앞에서 말한 기간변수와 사람변수 이외에도 상황변수나 행위의 복합관계성 변수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한가지 행위도 어떠한 상황에서의 행위냐, 혹은 어떤 사태·행위와 (보다 직접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얽혀 있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다양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업 법칙이 지켜질 것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도 업 법칙으로부터 예외적일 수 없다. 언급된 다양한 변수들은 업 법칙의 예외규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업 법칙의 비예외성을 설명해 주는 것일 수 있다. 예컨대 특정 행위가 업 법칙에 어긋나 보인다면, 그것은 인과기간의 무확정성이나 행위의 복합관계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의 과보는 일차적으로 존재의 범주를 결정한다. 주지하다시피 초기불교에 의하면 욕계(k madh tu), 색계(r padh tu), 무색계(ar padh tu)의 삼계가 있고, 이 중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욕계의 다섯 행로(pa ca gati)들 중 하나인 인간계이다. 인간은 자신의 업/행위에 따라 다섯 개의 상이한 존재조건들 지옥(nir yo), 축생계(tiracch nayoni), 아귀계(pittivisayo), 인간(manuss )계, 신(dev )계 중에서 한 곳에 태어난 것이다.

어떤 범주의 중생이 되느냐는 자신이 ‘어떻게 행위 해 왔느냐'(혹은 ‘어떻게 살아 왔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경전은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한 마디로 ‘개같이 살면 개가 되고 소같이 살면 소가 된다’고 한다. 한 숫타(Kukkuravatika Sutta)에서는 푼냐(Pu a)와 세니야(Seniya)라는 고행자가 나오는데, 이들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벌거벗고 소와 개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수행자들이다. 석존은 소와 개를 흉내 내는 이들의 고행이 이들을 해탈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축생계나 지옥계로 빠지게 한다고 말한다.

푼냐여, 여기 어떤 이가 개의 행실(kukkuravata)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개의 덕목(kukkuras la)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개의 마음(kukkuracitta)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개의 행동(kukkur kappa)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는다. 그가 개의 행실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그가 개의 덕목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그가 개의 마음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고, 그가 개의 행동을 완전히 중단 없이 닦으면, 몸이 부서져 죽은 후에 개의 동료(sahabyata)로 태어난다(upapajjati). 그가 만일‘나는 이러한 덕목, 행실, 고행, 범행에 의해서 신이나 다른 신이 될 것이다’와 같은 견해를 갖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두 가지 행로, 즉 지옥이나 축생계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푼냐여, 그의 개의 행실이 성공한다면 그는 개의 동료로 태어난다. 그것이 실패하면 그는 지옥에 태어난다.{{ Majjhima-nik ya I, 387-388쪽.}}

윤회의 영역인 다섯 영역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란 다른 어떤 영역에서 태어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가 크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영역보다도 인간계가 더 유의미하다. 열반으로 직결되는 영역은 오직 인간계뿐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떠다니다가 판자, 그것도 구멍이 뚫린 판자를 만나 자신의 목을 그 구멍 속에 넣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비유한다.

그런데 같은 인간계에서도 존재조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또한 자아의 업/행위에 따른 상이한 과보 때문이다. 같은 인간계의 인간도 업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존재조건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석존은 인간 사이의 우열, 수명의 장단, 건강, 미추, 권력, 빈부, 출생차, 지능차 등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하고{{ Majjhima-nik ya III, 202-203쪽.}}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중생은 행위의 소유자이며, 행위의 상속자이며, 행위로부터 태어난 자이며(행위의 모태이며), 행위를 친척으로 하며, 행위를 의지처로 한다. 중생을 열등하게도 하고 탁월하게도 하는 구별/차이(vibhajati)를 생기게 하는 것은 업이다.{{ Majjhima-nik ya III, 203쪽.}}

이 말은 인간 사이의 존재조건의 차이가 자신 스스로의 행위/업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말 자체는 과거행위에 의한 현재결정론으로도 읽혀질 수 있고 현재행위에 의한 현재·미래결정론으로도 읽혀질 수 있겠지만, 석존의 진정한 의도는 후자의 읽는 방식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행위의 자아는 자신의 행위에 따라 존재범주와 존재조건을 규정받고 규정하면서 윤회한다. 자아의 행위에 의한 이러한 의미의 도덕적 인과법에 따른 윤회는 12연기라는 마음의 구조에 의한 윤회나 오취온적 자아에 의한 윤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숙명론이나 운명론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혹자는 인간의 존재조건의 차이가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이상과 같은 도덕적 인과법으로서 석존의 업설이 양면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업설은 현실의 불평등을 고착·정당화시킬 수도 있고, 보다 나은 존재조건을 위한 각자의 노력을 촉구하는 교설일 수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업설은 실제로 현실에서는 양날의 칼로 기능하는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업설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체념을 가르치고, 그 속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으라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예컨대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업에 의해서 브라만이 된다’는 석존의 유명한 말은 불평등 계급사회에 대한 평등사회 촉구의 메시지로도 읽혀질 수도 있고, 출생이나 사회적 신분이라는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됨'(도덕성/행위)이라는 기준에 따른 새로운 평등사회 구현의 메시지로도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 그것은 진정한 행복을 위한 분투를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항상’ 변혁의 능력이 내재해 있다는 절대적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의 발현을 통한 진정한 인간평등과 인간존엄에 대한 요청이 업설의 깊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행위/업에 의한 윤회의 자아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능력의 인지와 그러한 능력의 온전한 발현이다.

지금까지 행위/업의 자아가 그 행위의 선악에 따른 과보를 받으며 존재조건을 결정하게 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윤회는 업/행위가 자아의 현재 존재조건을 규정하면서 자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행위, 습관, 성격/성향, 성품으로서의 업이 자아를 규정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행위, 습관, 성격/성향, 성품으로서의 업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업의 작용에 따라 매순간 무상하게 모습을 바꾸어 가는 업의 자아가 있을 뿐이다. 사실상 (고정의) 자아는 없고 업/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는 말도 이 맥락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윤회하는 자아의 업은 끊임없이 쌓여가면서 스스로를 증식시켜 간다. 그리고 업이 작용하는 현재의 무상한 자아/육신이 다할 때, 의식과 갈애를 만나 다른 생/태어남을 이루는 방식으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행하며 윤회한다.

윤회의 최초 시발점을 알 수는 없지만, 윤회과정 속에서 한 생이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기제는 업으로 설명할 때 이러하다. 즉 한 생이 다 한 후, 업은 의식과 갈애를 만나 다른 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업, 의식, 갈애가 만나게 될 때 새로운 생이 계속되는 ‘다시 태어남’이 있다고 한다. 이 세 가지의 만남은 밭에 씨를 뿌리고 수분/물을 주어 자라게 하는 것에 비유된다. 업은 밭에 비유되고, 의식은 밭에 뿌려진 씨앗에 비유되며, 갈애는 밭에서 씨가 나게 하는 수분에 비유된다.

‘존재(bhava), 존재’라고 말합니다. 석존이시여, 얼마나 멀리까지 존재가 있다고 말합니까? 아난다야, 욕계(k madh tu)와 익을 업이 없어져 버린다면, 감각적 존재(k mabhava)가 나타날 수 있겠느냐?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난다야, 업은 밭(khetta)이고 식은 씨앗(b ja)이며 갈애는 수분(sineha)이다. 무지에 덮여있고, 갈애에 속박되어, 열등한 세계의 중생들에 대해서는 열등한 세계(h na dhatu)에 의식이 자리한다(색계와 무색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함. 그러나 의식이 자리한 세계는 열등한 세계 대신에 각각 중간 세계와 수승한 세계임). 그러므로 미래에 존재의 다시 태어남(punabbhav bhinibbatti)이 있다. 아난다야, 이와 같이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A guttara-nik ya I, 223쪽.}}

이상의 비유는 업, 의식, 갈애 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윤회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세 가지 모두가 똑같이 중요하게 다음의 생/태어남에 기여한다.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다른 둘은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밭/업이 없으면 씨/의식은 무의미하고, 밭/업에서 씨/의식을 살아나게 하는 수분/갈애가 없으면 다시 태어남의 윤회는 지속되지 않는다. 이 셋의 결합은 현재 이순간의 삶의 윤회 속에서도 전제되지만,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거듭날 때도 전제된다. 따라서 우리가 ‘업/행위에 의해서 윤회한다’고 말할 때, 이 때의 ‘업’이라는 말 속에는 의식과 갈애가 수반되어 있다.

생/태어남의 연속으로서 윤회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1)업, 의식, 갈애의 삼자 결합은 앞에서 살펴본 2)의식과 명색의 만남과 3)부모의 성행위, 어머니의 가임기, (유사의식으로서) 간다바의 삼자결합에 의한 생의 연속과 연관지어 이해해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설명방식은 설명의 측면이 다를 뿐이다. 12연기의 마음구조에 의한 윤회와 오취온적 자아의 윤회에 대한 설명방식도 마찬가지다. 이들 다섯 가지 설명방식에는 공통적으로 의식의 작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공통된 윤회의 의식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업(혹은 업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행)과 갈애(혹은 집착)를 전제·수반{{ ‘함께 일어나거나 나타남'(『동아 새국어사전』(두산동아편집국 간행, 2003))이라는 의미에서의 수반.}}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4. 나오는 글

처음 문제로 돌아가 ‘무아의 윤회’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무아’와 ‘윤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입장에는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실체주의와 반실체주의라는 두 태도가 있고, 이 두 태도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서로 상이한 윤회와 해탈/열반의 개념이 있게 된다.

따라서 ‘유아윤회냐 무아윤회냐’와 ‘유아해탈이냐 무아열반이냐’의 문제는 자아에 관하여 실체주의 입장(유아론)을 취하느냐 반실체주의 입장(무아론)을 취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즉 실체아의 인정과 불인정의 문제로 귀착된다. 불교의 반실체주의 입장에서 본 ‘윤회’와 ‘열반’은 무아를 요구하여 무아, 열반, 윤회의 이 셋은 모순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 개념들이다. 그래서 ‘유아’라면 불교가 말하는 윤회와 열반이 가능하지 않다.

초기불교의 무아론의 한 특징은 의식이 조건적이라고 본 데 있다. 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주체일 수 없다. 항상 명색/몸이나 대상에 의존적으로만 기능한다. 이러한 의식의 속성은 생과 생의 연속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식은 명색과 결합해야 하거나 부모의 성행위와 가임기와 결합해야 한다. 의식이 적절한 조건을 만났을 때만 한 생에서 다른 생을 계속하는 윤회가 가능하다.

‘무아의 윤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무아의 윤회’를 중생의 심적 구조로서 12연기, 오취온적 자아, 그리고 업/행위의 자아에 의해서 설명해 보았다. 탐진치라는 근본번뇌로부터 비롯되는 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리하여 후속하는 11지가 조건적으로 발생을 계속하는 한 중생은 윤회한다. 또한 오온을 자아로 집착하여 그것들을 희구하는 한 중생은 윤회를 계속한다.

그런데 12연기, 오취온적 자아, 혹은 다른 어떠한 설명방식을 취하든지, 의식 업과 갈애를 전제·수반하는 의식 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의 윤회를 설명하는 핵심에 놓여 있다. 이를 가리켜 의식, 업, 혹은 갈애/집착에 의한 무아의 윤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이러한 무아 행위/업으로서의 자아 의 윤회는 연기법의 한 표현이다. 자아는 ‘연기하는’ 조건적으로/의존하여/연하여(pa icca) 함께(sam) 발생하는(upp da) 존재일 뿐이다. ‘조건적’이므로 불변의 실체아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발생하고’ 있으므로 자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발생을 계속하는 업/행위의 자아 무아 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업/행위의 자아가 현생을 윤회하고 있으며 또 다른 생으로 윤회한다. 이러한 자아를 ‘업에 묶여 있는(kammanibandhana) 중생'{{ Sutta-nip ta 654송.}}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업/행위만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연기하는 자아만이 있고 업의 자아만이 있을 뿐이다.

혹은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교적 의미에서 ‘현자는 연기를 보는 자이면서 (동시에) 업과 과보를 잘 아는 자'(pa it pa iccasamupp dadas kammavip kakovid ){{ Sutta-nip ta 653송.}}여야 한다.

그런데 업(의 자아)에 의한 윤회는 우리 삶에 적용되는 도덕적 인과법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며, 윤회과정 동안의 관계성에 근거하여 뭇 중생에 대한 자비를 요청하고 있다는 점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였지만 에서 독특하다.

업(의 자아)에 의한 윤회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섬뜩한’ 메시지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현재의 나는 나의 행위/업에 따라 윤회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선택이다.’ 우리는 사실 12연기의 윤회의 심적 구조를 좋아하며 오취온의 윤회의 자아를 선호하는 것이다. 윤회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윤회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석존이 출가 전에 가졌다는 다음과 같은 의문은 일순간 우리의 심장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다. ‘왜 나는 스스로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조건에 있으면서 또한 똑같이 그러한 조건을 구하고 있는가?’


안옥선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사 및 하와이대 철학과 박사. 현재 순천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서 및 논문으로 Compassion and Benevolence,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초기불교 윤리에의 한 접근』, 「불교윤리에 있어서 자기애와 타자애의 상호적 실천」, 「인간과 동물간 무경계적 인식과 실천」 등이 있다.
Categories Bud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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